떡잎부터 남달랐던 작가 지망생은 커서 인간 CRUD가 되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 꿈은 작가였다. 글쓰기 상도 그만큼 많이 받았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극작과 입시를 준비하며 매일같이 콩트와 시나리오를 썼다. 비록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공동 저자로 에세이를 출간한 적도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블로그라는 공간에 글을 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활자와 텍스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정도면 인간 CRUD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창작하고, 읽고, 수정하고, 가끔은 지워내는 삶. 내 일상은 온통 기록으로 굴러간다.
얼마나 기록에 진심인지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끝이 없기에, 이미지로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가장 오래된 기록 습관은 역시 일기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기로 써 온 일기가 벌써 10년 차, 일기장도 10권째다.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온 날도, 해외 여행을 갔을 때도, 병원에 입원했던 시기에도 꼬박꼬박 한 페이지를 채웠다. 이제는 일기를 쓰지 않으면 하루가 허전할 정도로 완전히 체화된 습관이다. 지금도 이 글과 동시에 일기를 쓰는 중이다😊
일기에서 시작된 기록은 조금씩 형태를 넓혀 갔다. 5년 동안 매일 작성해야 하는 QnA 다이어리도 빈칸 없이 완주했고, 올해부터는 퇴사 선물로 받은 다이어리에 그림일기까지 그리고 있다. 스스로 꾸준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일기를 쓴다는 걸 아는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단하다고 말해 준다. 그런 말들이 또 다른 동기 부여가 되어 오늘도 자연스럽게 펜을 든다.
혼자 쓰는 기록이 익숙해질 무렵, 블로그에도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주간일기 챌린지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이에 편승하고자 시작한 주간 회고지만 챌린지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매주 글을 올리고 있다.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만두었음에도 이상하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나는 정말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록은 타인에게 마음을 전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손편지 봉사활동은 평소 손편지 쓰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 나에게 정말 꼭 맞는 활동이다. 2년째 이어 온 편지도 어느덧 64통이 되었다. 숫자만 보면 많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1-2주마다 답장을 고민하고,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 직접 부치는 과정을 꾸준히 이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편지 한 장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지금도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하고 있다.
서비스 기획자로 전향한 뒤에는 기록의 대상이 업무로까지 확장되었다. 이전 직장에서 근무한 10개월 동안 업무 일지를 작성하고 이슈를 아카이빙하다 보니, 어느새 400건에 가까운 문서가 쌓여 있었다. 여기에 커리어 블로그까지 더하면, 숨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무언가를 기록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일상 깊숙이 자리 잡은 기록 습관은 자연스럽게 기획자라는 직업과도 이어졌다. 기록하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다 보니, 이제는 아예 기록하는 프로덕트를 직접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AI와 협업해 만든 태피스토리 블로그, 식단 기록 앱 끼니록, 그리고 현재 기획 중인 고양이 생활 기록 앱까지.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언제나 출발점은 같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쉽고, 더 오래 기록할 수 있을까?’
소비에 머물지 않고, 기록을 돕는 조력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서비스로도 연결되고 있다.
주변에서는 종종 “그 많은 걸 언제 다 써?”, “안 피곤해?”라고 묻는다. 하지만 나에게 글쓰기는 노동이 아니라 가장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과 감정을 마구 적어 내려가다 보면 신기할 만큼 마음이 차분해진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제3자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10년 동안 꾸준히 일기를 쓰며 얻은 것은 글쓰기 실력보다도 나 자신을 객관화하는 힘이었다.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흔들리는 순간에도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기록은 내게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삶을 버티게 해 주는 든든한 원동력이다.
창작 글부터 일상의 사소한 기록, 복잡한 감정까지. 지난 10년 동안 나는 수많은 조각들을 텍스트로 정리하며 살아왔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들은 여러 요구사항과 문제들을 구조화해 문서로 정리하는 PM이 되기 위한 기나긴 예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스스로를 기록하고 회고하는 습관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차분하게 문제를 바라보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기획자가 될 수 있었을까?
앞으로도 나는 계속 나를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데이터를 더 쉽게 기록할 수 있는 프로덕트를 만들며, 세상에 유의미한 흔적을 하나씩 쌓아가고 싶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나는 살아서 글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