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신입 기획자의 현실적인 고민과 방향 찾기
17살에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고, 23살에 첫 직장에 들어갔다. 남들보다 다소 이른 출발이었지만, 몇 번의 이직과 IT 기획자로서의 커리어 전환을 거친 지금, 나는 여전히 중고 신입이라는 출발선에 서 있다.
채용 공고 속 ‘3년차 이상’이라는 자격 요건을 볼 때면, 때때로 그 숫자가 거대한 벽처럼 느껴진다. 어느 곳에서도 가볍게 일한 적 없지만 개인적인 사정은 구직 시장에서 핑계가 되기 쉽다. 경력=실력이 아닌 걸 알면서도, 이력서 안에서는 짧게 끊긴 기간과 숫자만이 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짧은 경력을 넘어 나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증명해 나가야 할까? 이직을 준비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불안 속에서, 내가 내린 답을 차분하게 정리해 보려 한다.
돌이켜 보면 늘 익숙해질 틈도 없이 새로운 환경에 투입되곤 했다. 광고 모델 에이전시, 광고 대행사, 온라인 쇼핑몰, 중견 언론사, 모빌리티 스타트업까지. 속한 산업군도, 맡은 직무도 다 달랐다.
주 3일 이상 야근하며 모델 캐스팅 자료를 만들고, 바이럴 원고를 쓰고, CS와 운영을 동시에 쳐내기도 했다. 사수나 체계적인 온보딩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정신없이 적응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들은 나에게 빠르게 맥락을 파악하는 생존 근육을 길러주었다.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는 대신, 당장 조직에 필요한 역할이 무엇인지 찾고 먼저 부딪히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업무들을 닥치는 대로 해결해 나가면서, 내가 어떤 순간에 몰입하고 성취감을 느끼는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왜 같은 문의가 반복되는지, 고객이 어떤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끼는지, 운영은 왜 비효율적으로 흘러가는지, 이런 것들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주어진 업무를 수동적으로 쳐내는 것보다, 문제를 정의하고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 더 즐거웠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가장 큰 동기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IT 기획이라는 길로 들어섰다.
이력서를 정리할 때마다 짧은 재직 기간이 눈에 밟히는 것은 사실이다. 서류 통과조차 쉽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자꾸만 지원 버튼 앞을 서성이게 만든다. 정상적으로 버티기 힘든 환경도 분명 존재했지만, 이제 와서 환경 탓을 하며 위안을 얻고 싶지는 않다.
대신 그간 얼마나 밀도 있게 일해왔는지를 나의 무기로 삼고자 한다. 연차가 절대적인 시간의 양을 의미한다면, 밀도는 그 시간을 어떤 태도와 결과물로 채웠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짧은 기간 안에 남들보다 몇 배는 압축된 경험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나만의 방식을 만들었다.
사수가 없거나 온보딩이 부족한 조직은 역설적으로 나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누군가 가이드라인을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실무에 당장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고 직접 구축했다. 과거의 히스토리를 파악하기 위해 정책서를 작성하며 서비스의 구조를 샅샅이 뜯어보았고, 부족한 리소스와 시간은 AI 등을 이용해 효율을 높이며 극복했다. 완벽한 환경이 주어지기를 기다리는 사치는 허락되지 않았기에, 기획부터 운영까지 맨몸으로 부딪히며 업무의 빈틈을 메우는 법을 체득했다.
마케팅, CS, 운영 등 다양한 직무를 거치며 얻은 경험들은 끼워 맞출 수 없는 조각처럼 느껴졌지만, 기획자가 된 지금은 오히려 서비스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사용자가 서비스의 어떤 지점에서 불만을 느끼는지, 프로덕트는 어떻게 시장에 소구되어야 하는지, 조직은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지를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런 경험들이 짧은 경력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지워주지는 못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애매한 이력으로 보일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주어진 시간을 밀도 있게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움직여 왔다. 앞으로도 회사에서 시간만 때우는 게 아니라, 조직에 필요한 역할을 해내며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싶다. 지금까지의 경험들이 언젠가는 숫자 이상의 의미로 남을 수 있도록.
과거의 나는 늘 조급했다. 하루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일단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왔고, 그 조급함은 나의 커리어를 짧은 점선으로 만들었다.
기획자로서 나아갈 방향을 찾은 지금, 더 이상 눈앞의 불안에 등 떠밀려 선택하지 않으려고 한다. 무조건 버티자는 마음을 버리고, 안정적으로 길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니까. 화려하지 않더라도 천천히,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오래도록 기여할 수 있는 곳에서 견고한 커리어를 쌓아가는 게 목표다.
이제는 끊기지 않는, 강렬할 정도로 굵고 단단한 선을 그려나갈 차례다!